뇌성마비 진단을 받고 주로 병원과 가정에서 보이타 (Vojta) 치료를 하다가 89년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서울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

아이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진통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 처음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어떡해서든지 치료만 잘 받게 된다면 아이가 기적처럼 낫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 . 그때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나 홍보조차 되어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언뜻 떠올려지는 선입견들이 매우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들이 많았다 . 때문에 복지관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부정적이어서 병원을 다니는 것은 거부감이 없었지만 복지관을 다니게 된다면 정말로 아이의 장애가 굳어져 버릴 것만 같은 그릇된 고정 관념이 있었다 . 복지관으로의 발길이 늦어진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

우연히도 아이를 위한 어떤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그 곳에서 복지관 선생님 한 분도 참석하셔서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 중에 복지관에 대한 안내와 소개 내용이 참 인상적이었다 . 그걸 계기로 복지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병원과는 다른 새로운 분위기의 시설과 제도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 병원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넓은 공간에다 삭막하거나 긴장되지 않아서 아이에게도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 더구나 장애인을 위해 설계된 건물이라서 이용하는 데에도 병원과는 사뭇 다르게 편안하고 편리했다 .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이용자들에 비해서 턱없이 시설이 부족하던 때라 1년을 대기한 후에야 복지관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

처음 그 곳을 갔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

은비는 그때만 해도 경기가 완전히 조절되던 때가 아니라서 심리적으로도 무척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 더구나 치료라고는 보이타 치료만 받았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 집에서 보이타 치료를 시킬 때는 때로 아이를 달래가며 치료했던 터라 그나마도 가능했지만 다른 곳에서 아이를 치료할 경우엔 거의 필사적으로 뻗대며 거부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치료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 보이타 치료는 그 당시 한창 유행과도 같아서 거의 모든 기관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

물론 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경우엔 일차적으로 보이타 치료를 권유 받았는데 은비도 처음에는 보이타 치료를 추천 받았었다 . 그러나 아이를 보신 선생님은 치료에 난색을 표했다 . 은비에게는 보이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그 당시 아이의 상태를 본다면 치료가 우선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견을 낼 수도 없을 만큼 은비는 매우 긴장된 상태였다 . 그렇다고 치료를 포기할 수도 없었던 막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 다행히도 보바스 (Bobath) 치료를 담당하시던 선생님께서 은비의 치료를 맡아주시겠다고 하셔서 복지관과의 인연을 맺을 수가 있었다 .

복지관에서는 물리 치료 (PT) 이외에 아이의 인지나 심리적인 상태로 볼 때 다른 치료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 오랜 기간을 그곳을 다니면서도 잘못 전달된 덕분에 잠깐 받았던 작업 치료 (OT)를 제외한다면 다른 치료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 물리 치료의 경우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부감이 심했지만 보이타 치료와는 달리 놀이처럼 접근하는 치료 방식이 차츰 아이에게 흥미를 가져다 주었다 . 자발적으로 치료에 임했던 것은 아니었어도 병원과는 다른 자유로움 속에서 아이의 상태도 점진적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

은비는 치료를 받을 때 치료에 잘 호응하고 협조하기 보다는 거부하고 뻗대고 고집을 피우며 울기가 일쑤여서 치료를 시작해서 적응하기까지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하지만 주의를 조금만 다른 곳으로 돌려서 그 곳에 신경을 쏟게 할 경우엔 별다른 저항감을 갖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때엔 긴장감도 사라져서 뻣뻣하던 몸도 유연해 보였다 . (아이를 치료 시에는 필히 아이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장난감이나 특이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 )

복지관에서 치료를 받고 넉 달 가량 지났을 때 은비는 처음으로 네 발 기기를 하였다 . 그것도 다소 불안한 동작이 아니라 정확한 동작으로 네 발 기기를 하였다 . 보통 뇌성마비 아이들의 경우는 정상적인 네 발 기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 두 발이 한꺼번에 움직이던지 혹은 한쪽 발을 끌면서 네 발 기기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 정확하게 네 발 기기를 하는 아이의 모습은 이때부터 매우 특이하게 보여졌다 . 진도는 더뎠지만 네 발로 기는 동작이 이루어진 이후로는 조금씩 아이의 발달 과정도 변화가 일어났다 . 기어 다니는 동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자 앉아 있는 동작도 아주 안정되고 능숙해 졌으며 곧 이어 무언가를 붙잡고 일어서려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 이전까지는 앉아 있다가도 뒤로 벌렁 누워버리기가 일쑤여서 주로 누워서 배밀이로 기어 다니며 (혹은 바로 누운 자세에서 다리를 세워 발 뒤꿈치와 머리를 활처럼 휘면서 이동하였다 ) 활동을 하는 것이 주된 모습이었는데 (비록 배밀이밖에 안되긴 했지만 은비는 어려서부터 움직임이 유달리 많았다 .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탐색 활동을 했는데 이때는 뻣뻣하던 다리도 아주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어서 외부에서 은비를 진단하신 선생님의 견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 이때부터는 앉아 있다가 기어서 움직이고 무언가를 붙잡고 서려는 한 단계 위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게 된 것이었다 .

뇌성마비라고 진단은 받았지만 사실 은비는 다른 뇌성마비 아이들하고는 다른 점이 많았다 . 전체적으로 신체는 경직이 심했지만 경직으로 인한 외적인 변형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 손이나 발 얼굴 근육에 있어서도 언뜻 보아서는 장애아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변형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의 상태에 비해서 장애 정도가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아이의 움직임은 장애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손과 발의 움직임 모두가 민첩하고 원활해서 손으로 물장난을 하거나 발로 물장구를 치는 동작이 아주 유연했다 .

늘 호기심이 왕성해서 궁금한 것은 절대로 그냥 놓치는 법이 없었던 아이는 치료를 할 때는 그렇게도 죽겠다고 아우성치며 힘들어하던 붙잡고 서는 동작도 자신이 필요할 때면 여유 있게 붙들고 서서는 기어이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손에 쥐고는 다시 내려오질 못해서 낑낑 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이 때문에 여러 번 다치기도 많이 다쳤었다 . 이마나 턱은 자주 찢어졌으며 삐거나 심지어는 부러진 적도 있었다 . 늘 극성맞고 호기심 왕성하고 너무 과하다 할 만큼 활달해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때문에 어렸을 때는 항상 분주하고 움직임이 많아서 먹어도 살로 갈 만한 짬이 없었기 때문인지 마르거나 늘씬한 체형이었다 .

세우기 이전에는 은비는 경련성 사지마비 (spastic tetraparesis) 환자처럼 팔 다리가 뻣뻣하고 경직이 심한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우기를 하면서 오히려 운동 실조 (ataxia)에 가깝다는 진단이 나왔다 . 때문에 붙잡고 서기 동작이 이루어지면서 곧 보행도 가능할 것 같았던 아이의 상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 보행 연습에 들어가면 아이는 심한 두려움을 나타냈는데 걸음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거의 공포에 휩싸였으며 이때 두 팔은 자세의 안정감을 취하기 위해서였는지 위로 가슴 높이만큼 들려져서 걸음을 떼었다 . 물리 치료를 계속하면서 아이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아이는 혼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 보였다 . 치료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의 운동 실조 장애 때문에 혼자 걷기가 힘들 거라고 했지만 보행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 살짝 옷자락만 잡아 주어도 걸음을 잘 떼던 아이는 의지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금방 중심을 잃어버려서 좀처럼 걷기가 쉽지 않았다 . 더구나 성장해가면서 아이에게는 또 다른 장애가 나타나고 있었다 .

학령기가 다가왔지만 은비는 심한 정신지체와 아직도 완전히 조절되지 않은 경련 때문에 학교는커녕 조기 교육의 문턱을 들어서지도 못했다 . 슬픈 현실이긴 했지만 장애아들만 교육을 시키는 특수 교육기관에서도 은비처럼 장애가 심한 아이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보행이 가능하거나 신변처리가 가능하고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경우라야 입학이 가능했다 )의 경우는 받아들이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자리를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다행히도 중증의 장애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는 곳 (천사 특수 유치원 )을 알게 되었는데 그 곳의 원장 선생님은 당신도 약간의 시각 장애를 갖고 있어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하였다 . 더구나 교회의 지하 건물을 예배가 없는 평일 동안 빌려서 교육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그곳 교회의 신도들이 때로 일일 봉사자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 두 명당 선생님 한 분이 맡고 계신데다가 봉사자까지 있어서 중증의 장애 아이들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개별 교육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에 은비에게는 최적의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

집단 교육과 단체 생활 , 그리고 아이와 일대일로 실행하는 개별 학습 등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과 학습 방법은 아이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특유의 활달함과 사회성을 바깥으로 내보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뿐만 아니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석해서 교육을 받는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서 잦은 병치레로 허약함을 면치 못했던 아이는 오히려 더 건강해지는 모습이었다 . 이와 같은 유치원에서의 생활이 아이에게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된 것 같다 . 은비는 이곳에서 잘 웃고 장난이 심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예의 바른 아이라고 평가되었다 . (비록 이따금씩 아이들과 선생님의 머리를 잘 잡아당기기는 했지만 )

아이의 이런 변화를 보자 교육에 대한 기존의 고정 관념들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 오로지 건강에만 초점을 맞춰서 교육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했던 사고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 아이에게도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려 사회성을 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 뒤늦게 유치원을 들어가서 졸업을 한 것이 열한 살이었으니 은비는 이때서야 비로소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

학교에 들어간 나이가 너무 늦긴 했지만 그 이전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학교 문턱이 너무 높았다 . 장애인들만 다니는 특수학교라고 하여도 들어가려는 아이들에 비해서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던 때라 학교에 들어가려면 입학 자격 시험과 같은 테스트를 거쳐야만 했는데 은비로서는 그 테스트를 통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은비는 지체와 정신지체를 동반한 중증 중복 장애아이다 . 그러나 당시의 우리 나라의 교육 제도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은비와 같은 중증 중복 장애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다 . 지체 장애인이라면 인지가 따라주던가 정신지체 장애인일 경우에는 보행이 가능해야 하는 무언의 조건이 따라 다녔는데 은비처럼 걷지도 못하면서 인지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기존의 학교 제도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대처할 아무 대안이 없다는 것이 입학 불가 사유였다 .

은비가 그래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전 해부터 일기 시작한 장애아들의 초등교육 의무 교육화 바람 때문이었다 . 즉 전에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아이들 중에서 장애 정도가 비교적 가벼운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서 통합 교육을 받는 방향으로 바뀌고 그 애들이 나간 빈 자리를 그 전에는 학교에 들어올 수 없었던 중증 장애인들을 받는다는 취지였다 . 그러나 중증 장애아들을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시행 발표만 되어서 첫 해에는 그다지 호응도가 높지 않았다 . 은비가 들어갔던 그 다음 해 (1995년 )까지도 학교에 따라서는 은비처럼 장애 정도가 심한 아이들에 대해서 입학에 난색을 표하는 곳도 꽤 있었다 . 은비 역시도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학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

은비를 키우면서 느낀 것이지만 은비와 같은 장애아를 우리 나라 사회에서 키우려면 부모도 엄청 극성 맞고 강해져야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 같다 . 늘 남보다 더 뛰어나기를 목표로 삼는 교육 환경 속에서 치명적인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서 잘난 사람들만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치일 수밖에 없는 아이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내보이며 키우려면 엄청난 강심장이 될 수밖에 없다 .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 때문에 그릇된 고정 관념의 잣대로 가뜩이나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주는 말을 함부로 쏘아대기도 한다 . 그때마다 좌절하고 움츠려 든다면 아이들은 더욱 더 쪼그라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학교엔 들어갔지만 아이를 위한 어떤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보조 교사도 없이 단 한 분의 선생님이 15명 정도의 아이들을 통솔하며 가르친다는 것은 전보다도 더 열악해진 교육적 환경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특히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이분화 현상은 더욱 더 중증 중복 장애인들의 설 자리를 없게 만들었다 . 지체 장애인의 경우는 그들의 상태에 관계 없이 일반 학교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을 하였는데 그들은 교과서 수업을 하면서 입시 교육의 준비 과정 형태를 띠었다 . 반면 정신지체 장애인의 경우는 대부분 보행 장애가 없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과정을 실행하면서 생활 훈련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은비처럼 보행이 안되면서 인지 기능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그 어느 쪽 교육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 그렇다고 보조 교사가 투입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아이의 원활한 교육 활동을 위해선 부모라도 봉사자로 나서야 할 판이었다 . 가정에서는 아이의 육아로 지친 부모들이 다시 학교에서마저 아이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라면 분명 기대했던 목표는 아닐 것이다 .

각자 상태가 제 각각이고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는 화장실 출입이나 식사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는 전처럼 한 명의 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맡기려 한다면 교육의 내용이 부실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 더구나 한 가지 이상의 중복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어느 쪽 교과 과정을 적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지 더욱 더 애매모호해진다 . 은비의 초등부 학생 시절은 이런 시행 착오와 끊임없는 혼란과 갈등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

은비는 호기심은 매우 강한 반면에 주의력이 산만해서 더욱 더 교육을 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는데 유치원 시절엔 이런 경우 칸막이를 치고 다른 일체의 주의를 끌 만한 상항을 차단한 다음 아이가 과제물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효과를 얻었었다 . 그러나 여러 명의 학생을 한 명의 교사가 통솔해야 하는 학교 교육에서는 그와 같은 교육적 장치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 아이의 지나친 호기심은 때때로 다른 아이들의 수업에 방해가 되었고 (은비는 다른 아이들의 스케치북이나 과제물 , 혹은 색연필 박스나 색종이 등 눈에 띄는 모든 것 -주로 종이나 비닐 커버로 포장된 것 -을 손에 쥐고 확보하려는 기질이 있었다 )자신이 관심의 대상 밖에 있게 되면 손가락을 심하게 빨거나 혹은 손가락으로 침을 튀기는 문제 행동을 보였다 .

TV 나 비디오로 방영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만화에는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은 반면에 큰 소리나 야단 맞는 아이들을 보면 즐거워했고 일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아이들과의 교류를 즐기는 것 같았다 .

비교적 야단을 맞거나 강한 제지를 받게 되면 일시적으로 행동을 멈추곤 했는데 특히 무서운 선생님일 경우에는 누구보다도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 . 항상 새로운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에 학습에 있어서도 변화가 없는 과제물이나 학습 방법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새롭게 느껴지거나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소제들에 대해선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 때문에 선생님 중 한 분은 과제물을 새로운 재료로 구성해서 항상 변화를 시도하셨었는데 이때 아이는 자신의 과제물에 엄청난 관심과 집중력을 보였던 걸로 기억된다 .

아이의 생활통지표에 항상 따라다니는 말 중엔 아이가 종이 찢기에 아주 소질이 많다는 것이었다 . 종이 찢기 만으로 작업 치료를 해도 좋을 만큼 은비는 천부적으로 종이 찢기 명수였다 . 집에 잡지 책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찢는 걸 즐겼는데 희한하게도 칼라만 골라 찢어서 아이의 눈이 색맹은 아니구나 생각하고 웃어 넘긴 적이 있다 .

언어 구사는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사를 알리는 데는 그다지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 아이의 특징이기도 했다 . 자신이 갖고 싶은 것 , 좋아하는 것에 대해 명쾌해서 대충 비슷한 그것이 아니라 바로 원하던 바를 얻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요구했다 . 처음에는 이런 아이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해서 자주 아이를 야단치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은비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또 하나 있었는데 한 번 웃음이 터지면 한 시간이 넘도록 끊임없이 웃어대는 습관이 그것이었다 . 때로는 그와 같은 행동이 너무 심해서 아이를 야단쳐보기도 했지만 아이는 한 번 터진 웃음을 좀처럼 거둘 줄을 몰랐다 . 한때는 그런 아이의 행동이 경기가 아닌가 의심해본 적도 있었다 . 은비가 웃음이 많아진 건 어느 정도 경기가 조절되기 시작했던 학령기 전후 (만 6세 이후 )의 일로 기억된다 . 경기가 심해지면 아인 표정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 주변 상황에 대해서도 반응을 별로 보이지 않았고 항상 수선스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특유의 웃음소리도 감춰진 채로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듯이 보였다 . 그러나 어느 정도 자기 컨디션이 돌아오면 미소부터 지었고 다시 유쾌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로 돌아왔다 . 유난히도 큰 입으로 웃으면 듬성듬성 나온 뻐드렁니 사이로 악동 같은 아이의 개구장이 얼굴이 유난히도 돋보였다 . 때문에 아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늘 아이를 통해서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

은비는 아직도 기저귀를 사용한다 . 학교에서는 화장실 훈련을 시키지만 언어 표현이 안 되면서 전혀 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서 용변 훈련을 시키는 것만 가능 할 뿐 아이가 보고 싶은 시간에 맞추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 집에서는 손으로 바지 자락을 붙들고는 모종의 의사를 표현하지만 이 역시도 아이의 체력적인 조건에서 본다면 케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 더구나 은비는 체격이 좋은 편이라 키도 크고 덩치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 중증의 장애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어디서나 힘든 일이지만 사회적인 어떤 제도적 장치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더욱 더 힘든 일인 것 같다 .